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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7

    • 조회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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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보니 벌써 50살, AMD

    50년의 역사로 알아본 파란만장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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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05월 27일] - ‘CPU와 GPU 시장에서 만년 2인자’ AMD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매 순간 셀 수 없이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시장의 절대 기준이자 모두가 인정하는 1인자와 치열한 접점을 찾아갔다. 그 덕에 우리는 뛰어난 성능을 갖춘 제품을 꾸준히 접하고 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AMD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현지 기준으로 지난 5월 1일의 일이다. 사람으로 치면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는 뜻의 지천명이 된 셈이다.

    2인자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오늘을 맞았지만 사실 AMD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인생사로 얼룩져 감정이 복잡한 기업이다. 많은 이의 추억 속에 AMD는 오랜 적자 누적에 의한 위기, 저효율 제품에 대한 낮은 시장 경쟁력 등 안 좋은 이미지로 얼룩져 낙제점을 면치 못한 브랜드에 가깝다. 하지만 매 순간순간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인텔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뚝심을 펴내며 기술을 선도한 기록도 수차례에 달하는 기업이기도 했다.

    인텔 라이선스받아 CPU 위탁 제조
    자체 칩 설계하며 실력 키워

    AMD의 태동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세서의 위탁 생산이다.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 현 온 반도체에 인수) 출신인 제리 샌더스(Jerry Sanders) 외 7명의 동료가 힘을 합쳐 1969년 5월 1일에 AMD를 설립했다. 모든 회사가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처음에는 생존이 곧 성공이었다. 자체 설계에 기반한 논리 계산기 보다는 당장 수익과 직결되는 부문 동시에 고객 확보가 가능했던 페어차일드와 내셔널 반도체가 설계한 마이크로 칩의 2차 공급원의 비중이 높았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고, 그 당시가 Am2501, Am2505 논리 계산기(로직 카운터)와 양극 RAM인 Am3101이 연이어 대박을 터트리며 AMD의 인생에 서광이 비치던 시기다. 이의 성공을 발판 삼아 ‘자체’ 설계 비중을 늘려나갔다. 하지만 워낙 큰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인지라 수익성 확보가 늘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고 결국 1982년에 접어들며 인텔의 라이선스를 받아 하청 혹은 위탁 생신이라는 형태로 8086과 8088 칩을 생산하며 본격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 세계로 발을 들인다.

    만날 남 잘되는 일에 전념하던 AMD가 자체 프로세서를 내놓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무렵이다. Am9580, Am7970 등 PC와 사무용 프로세서는 그렇게 나왔다. 해볼 건 다 해봤다. 심지어 EPROM 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1986년에 선보인 100만 비트 EPROM인 Am27C1024은 그 당시 AMD의 위상을 알게 하는 대표 상징이다. 남의 것에 급급하면 내 발전이 부진한 법. 이 논리를 늘 상기하던 AMD는 나만의 것을 늘리는 데 늘 촉을 세웠고 Am286 같은 인텔 라이선스 기반 프로세서는 쏠쏠한 재미를 안겼다.

    늘 순탄한 것은 아니다. 위기도 예고 없이 닥쳤다. 인텔이 i386 관련한 라이선스를 취소하고 기술 사항 공개를 거부한 것. 이를 기점으로 두 기업 사이에 소송전이 벌어졌다. 결국 1994년, 캘리포니아주 최고 법원이 AMD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 사이, AMD는 인텔 80386을 리버스 엔지니어링(뜯어서 재구성)한 Am386을 내놨고 제법 높은 판매율을 기록하며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가능성을 최종 점칠 수 있었다.

    펜티엄 기점 자체 설계 CPU로 경쟁
    첫 1GHz 돌파 및 64bit 듀얼코어 상용화 성공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집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 자체 설계에 공을 들인 바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가 등장한 586 시절 본격적이 경쟁 구도가 잡혔다. 그 당시 AMD는 K5 프로세서로 맞불을 놓았다. 펜티엄 플랫폼에 호환하는 프로세서이자 당시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 제품으로 인정받으며 대안으로 부상했다. 오늘날의 AMD를 흔히 ‘갓 성비’라 불리는데, 이 무렵에도 그랬다.

    프로세서 경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인텔이 펜티엄2를 선보이자 AMD는 K6 프로세서로 맞불을 놨다. 역시나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우며 주목을 끌었다. 시대 변화에도 차분히 대응해 컨디션을 유지해나갔다. 당시에는 멀티미디어 가속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관련 기능 강화에 초점을 맞추던 때다. 인텔은 MMX(MultiMedia eXtension)라는 이름의 멀티미디어 관련 부동 소수점 처리 명령어를 확대 적용하기 시작했다. AMD 역시 3D나우!(3DNow!)로 대응하며 인텔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이후에는 속도 경쟁으로 이어졌다. 인텔은 펜티엄(Pentium)3, AMD는 코드명 K7인 제품명 애슬론(Athlon)으로 구도를 형성했다. 이 무렵이 속도가 관건이던 시기이자 누가 1GHz에 도달하는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AMD가 처음 1GHz를 돌파(애슬론 1000)하며 인텔의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다. 한발 늦게 인텔이 1GHz 기반의 펜티엄 3을 내놓긴 했지만, 시장 판세는 AMD로 기운 이후였다.

    첫 테이프를 성공적으로 끊은 AMD의 발걸음은 더욱더 가벼웠다. 2003년에는 처음 64bit 기반의 프로세서인 옵테론 64와 애슬론 64를 공개했다. 32bit 프로세서에서 64bit로 전환이 이뤄지던 시기인데, 그로부터 1년 뒤에는 한 다이에 코어 두 개를 온전히 담은 듀얼코어 프로세서 ‘애슬론64 X2’도 잇달아 선보였다. 돌이켜보면 50년 역사에서 가장 시장 점유율 상승에 거침이 없었던 그야말로 AMD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꿈이 너무 컸던 것일까?
    야심 차게 준비한 ATI 인수 이후 내리막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텔이 강력한 제품을 연이어 출시한 것도 있지만, 애슬론 시리즈의 성공에 취해 너무 안일하게 대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무리한 ATI 인수전이다. 2006년 당시 54억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한 ATI는 이후 내놓는 제품마다 실패를 거듭하며 AMD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AMD의 구상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해 상황이 어렵게 된 부분도 적지 않다. 당시 AMD는 프로세서와 그래픽 프로세서를 합치는 ‘프로젝트 퓨전(Fusion)’에 집중했다. 하지만 개발에 난항을 겪다 결국 2011년에 ‘가속 처리 장치(APU)’를 내놓았지만 애매한 구성으로 이마저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차기 프로세서에서 비롯됐다. AMD는 오랜 시간 기존 아키텍처를 확장하며 버텨왔고, 2011년 하반기에 새로운 아키텍처인 불도저(Bulldozer) 기반의 다중코어 프로세서 ‘FX’를 공개했지만 기대 이하의 전력 대비 성능으로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최대 8개 코어로 새로운 효율성을 보여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실제로는 동급 인텔 쿼드코어 프로세서 대비 낮은 성능을 보이면서 많은 점유율을 내줬다.

    한때는 인텔의 위세를 꺾을 정도인 AMD의 명맥이 결국 끊겼다. 꾸준히 만들어 왔던 파운드리(FAB)를 모두 글로벌파운드리(Globalfoundries)에 넘겼고, 모바일 그래픽 사업부는 퀄컴에 매각(6,500만 달러)했다. 사실상 돈 되는 것은 죄다 내다 팔았다. 직원 수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2015년 기준 무디스가 AMD를 투자 부적격으로 지정했고, 당시 인텔의 CEO가 “AMD는 다시는 우리의 상대가 아닌, 퀄컴에 집중하라”는 내부 지침을 보낸 사건은 AMD 역사상 기록된 최악의 굴욕이다.

    그런데도 꾸준히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모토를 다지며 제품 라인업을 구축했고 시장에 대안을 제시해 왔다.

    부진의 터널 지나 부활의 기지개 켜나?
    그 중심에 있는 커스텀 프로세서와 라이젠

    AMD는 꾸준히 활로를 모색해 왔다. 한 차례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자신이 품고 있는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 입맛에 맞춘 커스텀 프로세서의 개발이다. 자사의 프로세서와 그래픽 프로세서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소니(플레이스테이션4)와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360)에 APU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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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부를 다양하게 나누기도 했다. 라데온 그래픽 부문은 라데온 테크놀로지 그룹으로 분사한 것은 잘 알려진 예 중 하나다. 동시에 차기 프로세서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012년 AMD의 SOS를 받고 3년 만기로 입사한 짐 켈러(Jim Keller)가 젠 마이크로 아키텍처를 개발자가 테슬라 부사장으로 이직할 당시만 해도 지금은 없었다. 하지만 2014년 10월 새로 취임한 리사수 CEO가 도중 중단된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상에 공개한 ‘라이젠’ 프로세서는 AMD 삶에 구세주로 등극했다.

    AMD 내부에서도 차마 확신하지 못했기에 지난 2017년 공개될 당시만 해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던 라이젠 프로세서는 AMD 점유율을 이끌며 3%에 불과하던 수치를 2019년 1분기 당시에는 무려 41%로 끌어올리며 여지를 만들었다. 단숨에 인텔 경쟁 프로세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의 성능을 구현했으며, 확장성 또한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AMD는 32코어 이상의 코어를 품은 다중코어 프로세서 ‘스레드리퍼(Threadripper)’를 선보이기도 했다. 인텔이 부랴부랴 4코어로 제한했던 코어 프로세서의 코어 수를 8개로 늘렸고, 10코어 정도가 최대였던 HEDT(하이엔드 데스크톱 프로세서) 라인업도 18개 코어로 늘렸다. 경쟁이 가져 온 긍정적 효과였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AMD는 처음으로 7nm 미세공정을 도입하며 경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프로세서와 커스텀 프로세서가 또 다른 신세계를 예고하고 있다. 만년 2인자라는 타이틀에 마침표를 찍는 그 날이 도래할까?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쳐 50년 만에 여기까지 온 AMD 그리고 현 수장인 리사수. 포브스는 지난 2017년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50인에 그녀를 포함했고, 2018년 AMD는 CES 2018 무대에서 최우수 혁신상을 받았다. 그 사이에 2015년 기준 시가총액이 21억 달러에 불과하던 회사는 2018년 12월 기준 205억 달러로 3년만에 880%가 증가했고 이의 여세를 몰아 2019년 1월 2일 CES 2019에서 리사수가 기조 연사로 나왔다. 아울러 2019년 5월 27일 컴퓨텍스 2019 시작을 알리는 키노트 무대에도 연사로 나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할 계획이다.


    By 김현동·강형석 공동취재 hyundong.kim@weeklypost.kr
    〈저작권자ⓒ 위클리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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